Q: 저는 성공회 신자이며 기독교 명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키팅 신부와 존 메인의 중간쯤 되는 사람입니다. 저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누워서 명상을 하는데,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만트라처럼 외우고, 숨을 들이쉴 때 "지" 음절을 조용히, 내쉴 때 "서스" 음절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게는 다소 고통스러운 고민이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된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어떤 방법보다 의도가 더 중요한 걸까요? 도와주세요. 그리고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A: 부디 평안하세요. 토마스 머튼은 의도에 대한 여러분의 직관을 뒷받침하는 이 아름다운 기도문을 썼습니다.
“나의 주 하나님, 제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끝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잘 모릅니다.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열망이 실제로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고 믿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 속에 그 열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열망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한다면, 비록 제가 아무것도 모를지라도 당신께서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제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항상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이 항상 저와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결코 저를 홀로 위험에 맞서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은 또한 기독교에서는 동기가 모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향심기도를 가르칠 때, 관상 아웃리치(Contemplative Outreach)는 '기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판단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잠재적인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향심기도는 기도의 한 방법이라고 불리며, 규칙이 아닌 지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역사에 동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기도가 관계라면 각 사람의 관계는 기도의 본질을 실천해 나가면서 발전하고 진화할 수 있다는 인식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침을 알게 되면, 영, 즉 삶의 상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영이 사람들을 움직여 적응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등을 대고 눕는 것이 기도하기에 적절한 자세임을 이미 확립했습니다. 매일 시간을 내어 기도를 충실히 바치면 삶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향심기도는 신과의 관계이자 그 관계를 키우는 데 봉사하는 수행입니다. 신과의 관계가 성장하고 깊어짐에 따라, 말이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더욱 수용적이고 비개념적인 관계 수준으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향심기도에서 우리의 신성한 단어, 호흡, 시선은 본래적인 의미가 없으며, 단지 신의 현존과 행위에 동의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수행자들이 신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무의식의 고요함이 해소됨에 따라 신성한 상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보고합니다.
- 정말로. 칼 아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