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신비, 특별한 은혜: 통일적 명상 수행에 대한 통찰력

Opening Minds, Opening Hearts 시즌 3 에피소드 5

Dr James Finley와 함께

 

에피소드 제목 ~ 평범한 신비, 특별한 은혜:

통일적 명상 수행에 대한 통찰력

"하나님의 자비는 바다와 같고 모든 방향으로 경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고통을 만지면, 고통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 제임스 핀리 박사

 

이번 시즌에 게스트들과 나눈 대화는 깊은 특권이자 진정으로 겸손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콜린과 마크는 함께 학생들의 역할을 수용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관상적 수행과 명상을 탐구했으며, 이 에피소드의 게스트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신비주의자들의 지혜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토마스 머튼의 학생이자 임상 심리학자인 제임스 핀리 박사의 '발치에 앉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짐은 우리의 신성한 내주와 연결되는 것이 두려움과 수치심을 초월하고 우리를 진정한 자아로 깨우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는 Center of Action and Contemplation의 교수입니다.

Jim은 다음을 포함한 수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머튼의 궁전은 어디에도 없다, 관상하는 마음, 치유의 길 그리고 기독교 명상그는 또한 Kirsten Oates와 함께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의 팟캐스트 Turning to the Mystics를 공동 진행합니다.

명상적 실천,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 내에서의 명상적 실천이 어떻게 삶의 모든 측면에서 신의 현존을 통합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고통과 평범한 상황을 놀라운 은총의 표현으로 변화시키는지 함께 탐구해 보세요.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다음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통합적 경험과 신비로운 상호 연결성: 짐은 모든 존재와 신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통일성은 이원론적 사고를 초월하여 신의 현존이 모든 것, 심지어 평범한 것에도 스며드는 경험을 촉진합니다.
  • 신비주의 기독교와 영성 간성: 기독교 신비주의와 다른 영적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이 토론은 관상의 보편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토머스 머튼과 같은 신비주의자의 통찰력과 Centering Prayer와 같은 수행을 연결하여 선(禪)이나 ​​수피 전통과 같은 다른 신비적 경로와의 유사점을 보여줍니다.
  • 변형 경로로서의 명상적 실천: 대화는 명상 수행의 변형적 잠재력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Centering Prayer와 같은 수행은 우리가 각 순간의 즉각성 속에서 신을 경험하고, 내면의 고요함을 기르고, 신성한 사랑에 눈을 뜨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취약성과 항복을 통한 영적 성장: 우리는 깊은 영적 성장에 필수적인 취약성과 미지의 것에 저항하는 인간의 경향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친밀감을 향한 여정의 일부로서 우리의 깨어짐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 고통과 일상 생활 속의 하나님의 현존: 짐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현존에 대한 신학을 표현하면서, 평범한 순간과 삶의 투쟁 속에서도 신성한 은혜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묵상의 길은 모든 순간, 모든 호흡의 신성함에 머무는 길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손에 사랑으로 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사랑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입니다."

- 제임스 핀리 박사

 

Contemplative Outreach의 창립 신학 원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면 방문하세요. www.contemplativeoutreach.org/vision

Dr James Finley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웹사이트에서: https://cac.org
  • 아직 그렇지 않으셨다면 현재 제공되는 Turning to the Mystics 팟캐스트의 10개 시즌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팟캐스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나 직접 방문하셔도 됩니다. CAC 웹사이트.
우리와 더 연결하려면:
 

Opening Minds, Opening Hearts 시즌 3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가능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기부자 Contemplative Outreach 커뮤니티와 다음으로부터의 보조금도 받았습니다. 명상 과정에 대한 신뢰 명상, 마음챙김, 관상 기도를 장려하는 자선 재단입니다.

이번 Opening Minds, Opening Hearts 에피소드는 Rachael Sanya가 제작했습니다 👉🏽 www.라첼산야.com  
지금 YouTube, Apple, Google, Amazon 등에서 Opening Minds, Opening Hearts 팟캐스트를 무료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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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제목 - 평범한 신비, 특별한 은총: 통일적 명상 수행에 대한 통찰력

 


마크 : 모두를 환영합니다.

소녀: 안녕, 마크.

마크 : 시즌 3으로. 안녕, 콜린.

소녀: 안녕하세요 여러분.

마크 : 또 한 번의 에피소드를 위해 다시 모이게 되어 기쁘네요.

소녀: 우리는 이 깊은 물에서 수영하고 있고, 저는 이 계절을 사랑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호기심을 위한 공간을 갖는 것이 저에게 가장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 면에서 이 계절이 그것에 관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마크 : 우리는 이미 훌륭한 게스트를 모셨고, 오늘도 훌륭한 게스트를 모셨고, 다른 관점에서 묵상과 명상을 탐구합니다. 다른 종교적 관점뿐만 아니라 오늘 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신비주의자들의 지혜와 우리 중 일부가 잘 알지 못하는 언어도 가져옵니다. 비록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자랐더라도요. 저는 그 가르침의 깊이에 있어서 그런 방식으로 뛰어드는 것에 대해서도 흥분됩니다.

소녀: 수피교도와 불교도의 이야기를 듣고, 스노매스에서 토마스 신부가 경험한 대화에서 전통 간의 공통점에 대한 인식이 열리는 것을 보는 것은 기독교적 경험에 폭을 더해줍니다. 그것은 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제 경험을 더욱 깊게 합니다. 그것은 즐거웠고, 특히 오늘이 매우 기대됩니다.

마크 : 나도 그래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소녀: 시작해 봅시다. 

마크 : 네, 저는 청취자들에게 토마스 머튼의 학생이자 임상 심리학자인 제임스 핀리를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제임스 핀리 박사는 우리의 신성한 내주와 연결되는 것이 두려움과 수치심을 초월하고 우리를 진정한 자아로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짐은 Center of Action and Contemplation의 교수입니다.

그는 다음을 포함한 많은 책의 저자입니다. 머튼의 궁전, 어디에도 없는 곳, 명상의 마음, 그리고 기독교 명상. Jim은 또한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의 팟캐스트 진행자이기도 합니다. 신비주의자들에게로의 전환. 짐, 콜린과 저는 당신이 몇 년 동안 해온 일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환영합니다.

짐 : 네,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소녀: 네. 당신을 만나서 정말 기쁩니다. 짐이 CAC에서 교수가 되기 전에, 그는 제가 참석했던 로스앤젤레스의 Mount St. Mary's Spirituality Center에서 진행하는 소규모 영적 지도 훈련 프로그램의 교수였고, 당신은 제 영적 여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말하곤 했고, 지금도 말하죠. 선생님을 찾아, 선생님을 찾아. 여러 면에서 당신은 제 첫 선생님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경에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좋고, 당신이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짐, 우리는 이 모든 에피소드의 기본 틀에서 게스트를 초대하여 각자의 신앙 전통에 대해 먼저 간략히 이야기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토마스 키팅 신부가 말한 궁극적 현실의 맥락에서 이야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어는 그가 20년 넘게 Snowmass에서 나누었던 이러한 영적 대화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우리가 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당신이나 신비주의자들이 이 궁극적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독교 명상 전통의 전반적인 세계관의 맥락에 놓고 그것이 궁극적 현실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말입니다.

짐 : 네. 제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시적 이미지를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비선형적이기 때문에 설명적이지 않습니다. 정의할 수는 없지만 시적으로 증거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세계관, 관상적 기독교의 시대를 초월한 지혜는 또한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의 신비적 전통의 시대를 초월한 지혜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주로 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인 신비적 가톨릭교, 신비적 전통의 모국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키팅 신부는 이것에 깊이 빠져 있었고, 그는 익명으로 쓰여진 고전에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Unknowing의 구름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져와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도원에 있었을 때, 토마스 머튼이라는 이름으로, 그는 또한 이 혈통을 체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저를 신비주의자들의 고전적 텍스트로 인도했는데, 그것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에 대한 몇 가지 이미지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Centering Prayer에 대한 질문은,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의 내적 논리는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를 찾는 맥락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비주의자들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에 대한 일련의 시적 이미지를 공유하고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보고 싶다.

소녀: 예. 

짐 : 좋아요. 첫 번째는, 제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갔는데, 1961년이었고 토마스 머튼이 초보 마스터였어요. 그때 그는 초보들에게 강의를 하셨어요. 그는 창조, 창조의 신비에 대한 강의를 하셨어요. "태초에 신이 빛이 있으라 하셨다" 등등. 저는 창조가 영원하고 절대적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먼저 숙고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에요.

창조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돌과 나무와 별이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현실에 초기 추진력을 주고, 떠나 우주가 스스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창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숙고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적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현존은 스스로를 현존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자신을 쏟아내고, 선물의 친밀한 직접성과 우리의 현존, 다른 사람들의 현존, 그리고 하나님 없이 우리의 공동의 무(無) 속에서 모든 것의 현존의 기적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내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이라는 게 아니라, 사실 신이 없다면 우리는 완전히 무(無)입니다. 하지만 신이 없다면 바로 무(無)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신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신이 없다면 무입니다. 다른 이미지를 하나 더 들자면, 손에 돌을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의 무한한 존재는 그 돌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신이 없다면 무(無)입니다. 자아의식 속에서는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명상 상태에서는 그것에 의해 촉진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산에서 혼자 걷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처음에 마음의 소유욕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거나 부동산처럼 소유하려고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서둘러 이 길을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보고, 마지막에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산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신의 몸이며,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사랑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신, 이 지속적인 자기 기부 행위, 신의 무한한 현존이 내 현존의 기적으로 선물로 현존한다면. 만약 세는 동안 신이 신의 무한함을 나의 실체이자 신 없이는 나의 무(無)로 쏟아내는 것을 멈추신다면, 세는 동안 나는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 밖에서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이 내가 이 강연을 하는 것을 도와주길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잘 해낼 겁니다. 나는 어설프게 헤쳐나갈 겁니다. 신이 내가 이 강연을 하는 현실로 자신을 쏟아내지 않는다면, 강연도 없고, 짐 핀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 강연을 듣는 사람이 있다면, 신이 세는 순간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이 세는 순간에 온 우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저절로 진행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현실의 신이 주신 경건한 본성에 대한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너희는 볼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자신의 신이 주신 경건한 본성과 하나님 없이는 무의미한 것을 볼 수 있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모든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모든 혼란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그리고 지구에 행하는 모든 외상적인 일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입니다. 지금 당장 눈을 감거나 눈을 감은 채로 내면적으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우리 자신의 깨어난 눈으로 예수께서 보신 것과 그가 보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우리는 신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본 모든 것에서 신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놀라운 점은, 당신이 기도하며 복음서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보셨든 창녀를 보셨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의 기쁨을 보셨든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의 슬픔을 보셨든 상관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셨든, 사형 집행자들을 보셨든, 꽃이나 새를 보셨든 상관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본 모든 것에서 신을 보셨습니다. 주님, 제가 제 자신의 깨어난 눈으로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모든 것의 신성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므로 이것은 창조의 신비와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명상적 이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자연에 해당합니다. 이제 사람으로서의 우리에게, 이것은 돌과 나무와 별과 세상의 강과 바다에 해당하지만 우리는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신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에 의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에 의해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의 신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사랑은 항상 제공되고, 결코 강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정체성에 대한 신비로운 세계관에 대한 시적 이해에 대한 또 다른 명상이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에게 진정한 자아, 궁극적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수도원에서 댄 월시 밑에서 중세 철학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던스 스코투스와 보나벤투라, 어거스틴의 프란치스코 학파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시적 창조물이에요. 창조 전에는 신에게 사랑을 위한 능력이 없었거든요. 신은 actus purissimus이기 때문이에요. 신은 넘치는 무한한 사랑 자체이거든요. 테이블에 유리잔이 있고, 물을 붓고 있는데 물이 넘쳐흐른다면, 유리잔에는 물을 담을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가득 찬 거예요.

그래서 신이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의 무한함을 내어주어야 할 필요성 속에서 신은 capax dei를 창조합니다. 신은 신의 무한함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창조하고,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참된 자아입니다. 당신은 무한함의 관대함 속에서 창조되었고, 당신은 신의 관대함입니다. 당신은 신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신과의 초주관적 교감입니다. 그리고 신은 그것을 실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부터 신 안에 있으며, 우주의 기원 이전에 그리스도와 신과 함께 영원히 숨겨져 있습니다.

영원부터, 이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신의 꿈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신을 창조했을 때, 당신이 있고, 내가 있고, 신은 내가 태어나고, 창조되고, 잉태되었을 때 나를 창조하기 위해 내가 누구일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영원부터, 신 아버지는 말씀 안에서 나를 영원히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신이기 때문에, 이것이 나의 신성입니다.

이것이 태어나지 않은 나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내가 신의 능력으로서 무한히 누구인지 결코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코 태어나지 않은 나는 결코 죽지 않을 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입니다. 하지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신이 내 생일에 짐 핀리가 있게 하라 하셨을 때, 나는 여기 있습니다. 신은 시간과 공간에서 나를 현실로 만드는 본성을 나에게 주심으로써 이것을 현실로 만듭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나의 본성은 합리적 본성이며, 과학과 문화인 이성입니다. 하지만 본성에 대한 가장 깊은 것은 사람을 인식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정원 이야기, 정원의 신화적 이야기에서 그들의 본성은 신성함으로 반투명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이런 식으로 빛났습니다. 타락의 신비는 신 없이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타락입니다. 신 없이 자아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 모든 신비적 전통은 우리가 여전히 상처에 갇혀 있다고 가르칩니다. 자아 의식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아의 신성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 신성을 경험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예수에 대한 믿음의 선물이며, 우리의 방탕한 방식, 우리의 혼란 속에서 신이 우리에게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방탕한 방식 가운데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계시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로 왔습니다. 

그런 다음 믿음의 선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들을 때, 내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힘을 통해,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이것이 제 제자도입니다. 나는 무한히 사랑받는 깨진 사람으로서 이 땅을 이렇게 걷습니다. 그리고 나의 깨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 자신의 소중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믿음인 하나님의 의미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호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원시적인 내면의 확신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그것은 가려져 있습니다. 보세요,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통찰력으로서 마음에 가려져 있고, 우리 자신의 깨어남의 이야기와 신성한 역사의 길에 감동을 받은 것으로 기억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열망인 그리스도와 더 비슷해지고, 더 사랑스러워지고, 등등에 가려져 있습니다. 가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 죽음의 베일을 통과할 때, 그것은 영광으로 베일을 벗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지금 무한히 사실이지만 베일을 벗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을 때, 그것은 영원히 베일을 벗길 것입니다. 

이제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는 곳입니다. 미지의 구름, 첫 번째 장에서 그는 기독교 생활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삶, 즉 종교, 문화적 삶,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거나 소속감을 주는 삶이 있습니다. 특별한 방법은 신이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적인 성실함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께 당신을 따르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효과적인 거룩함을 따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 하나님과의 하나됨과 헌신적인 성실함, 그리고 영광으로 베일을 덮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이 그리스도인의 삶, 이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런데, 이 단계에서 기도, 하나님과의 일상적인 만남이 렉시오 디비나, 담론적 명상, 그리고 기도. 그래서 Lectio에서 나는 조용한 곳에 앉아, 성경을 펼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저는 예수님의 불멸의 현존이 지금 당장 두려워하지 말라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Lectio Divina는 사랑으로 주입된 지속적인 주의력입니다. 명상에서 신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했으니, 이제 네가 나에게 말해, 어떻게 생각하니? 여기서 일기를 쓸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은 그것에 서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것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당신은 신과 매일 만나고, 당신의 일상을 살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가지고 있고, 저는 제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Unknowing의 구름 이것은 작은 서문이라고 합니다 무지의 구름. "이런 가운데, 깨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깨어나는 사건에서," 그는 말합니다, "당신의 가장 깊은 존재에서 맹목적인 사랑의 자극이 있고, 당신을 사랑하도록 자극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경험 많은 관상가들이 하는 것처럼 항상 이것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끔 당신은 존재의 바로 그 기초에서 관상적인 사랑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어나는 빠른 속도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사람이 이런 순간을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에 대한 예를 들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자연 속에서 산책을 하다가 새떼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마치 눈꼬치로 새떼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마치 원시적이고 광대하며 진실된 무언가를 포착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이 이미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삶의 신성함처럼 우리를 덮칩니다. 때로는 아이에게 좋은 밤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아이가 있는 곳에서는 신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이 접촉으로 빠르게 움직입니다.

저는 이게 모든 사람에게 온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옵니다.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에 앉아 있을 때, 그 감촉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우리가 그것에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덧없이 엿보이는 죽음에 머물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그리움. 그리고 이것이 명상의 길입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입니다. 보세요? 저는 가장 어린아이 같은 시간에, 사랑의 시간에, 상실의 시간에, 하루가 끝나갈 때의 조용한 시간에, 미술관에서의 조용한 오후에, 저를 감동시키는 두 줄의 시 사이에 앉아 있는 동안, 깨어난 제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일체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저는 냉소적인 척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이 소중한 작은 순간들이, 때로는 이 깨어나는 순간들이 정말로 매우 강렬해서, 그 여파로 당신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때로는 아주 어릴 때, 당신이 살아나는 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됨을 맛보고 나서는 존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됨에 머물고자 하는 신이 주신 소망이며, 그것이 길이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Unknowing의 구름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한, 이 책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방법을 말해 줄 테니까요. 매 순간, 매 호흡의 신성함에 머물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머튼은 그것이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피 속에서 뛰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사물에 대한 느껴지는 감각입니다. 센터링 기도가 의미를 갖는 곳에서 우리는 센터링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적 논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기도, 순례자가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선 명상, 심층 요가, 나마스테, 나는 그것이다, 루미와 무신론자의 수피 방식 등과도 놀라울 정도로 공명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러한 신비로운 일체성의 공명을 봅니다. 당신은 일체성의 맛을 봅니다. 당신은 덧없는 맛이 덧없는 맛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숨쉬는 모든 신성의 궁극에 습관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스승입니다. 보세요, 스승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저자는 Unknowing의 구름 신비로운 스승입니다. 그는 그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한 길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논리가 있습니다. 기도 자체를 하기 전에 이것에 대한 시적 이미지를 하나 더 제공하고 싶습니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도(道)가 현실 자체의 내적으로 흐르는 신성함, 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도는 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신의 은혜가 쏟아져 나와 스스로를 줍니다. 우리는 무한한 관대함의 점진적인 실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의 무한한 관대함에는 점진적인 것이 없습니다. 무한함은 모래알 하나하나, 나무의 잎 하나하나처럼 무한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일어서고 앉으면, 쏟아지는 신성의 관대함입니다. 점진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정도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미 다음 회의에 늦었고, 휴대전화가 울리고, 그게 어떤 것인지 알죠.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터치를 받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꽃 냄새를 맡고, 거리를 달려오는 아이를 봅니다. 아니면, 밤에 어둠 속에서 깨어서 숨소리를 듣고, 가끔씩 숨소리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숨소리에 감동을 받으면, 어떻게 하면 이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이것이 구도자의 길입니다. 

그리고 여기 탐색자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한 예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저는 자연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친밀감일 수도 있고, 고립일 수도 있고, 침묵일 수도 있고, 시일 수도 있고, 봉사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자연을 선택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퇴근하고 집으로 운전하고 있고 해가 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일 밤 해가 집니다. 하지만 오늘 밤 해는 특히 웅변적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차를 길가로 몰고 가서, 내리고, 작은 경사지를 내려가서 거기에 앉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를 당신에게 내어주는 지는 해의 아름다움에 몸을 맡깁니다. 그것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저는 이 순간에 대한 몇 가지 관찰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그것은 고조된 인식의 순간입니다. 무기력하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생생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차리세요. 당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일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생각을 넘어선 이 고조된 인식의 풍부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당신과 그것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초월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거기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이 일몰이라고 불리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어렸을 때 당신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는지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억의 행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녀성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태양은 오늘 밤 전에 결코 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영원을 통해 다시는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처녀적인 새로움이며, 그래서 당신과 그것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초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충만함을 설명할 수 있는 당신의 힘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원하는 것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초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관능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은 매우 관능적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에 만족하게 되면, 당신은 그것의 풍요로움에서 빠져나옵니다. 당신은 어떻게든 신의 화신의 신성함처럼, 감각의 영성의 흐름에 자신을 계속 항복해야 합니다. 당신은 차에 다시 타고, 집으로 운전하고, 멈추고 식료품을 사러 갑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방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우편물을 받고, 쓰레기를 버리고, 우편물을 살펴보고, 청구서를 버리고, 당신은 해가 지는 순간을 기억하고, 당신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탐구자의 질문입니다. 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내적 풍요로움의 바깥쪽 원주에 갇혀서 깨어 있는 시간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걸까요? 왜 하루의 요구의 원심력이 나를 이 하나됨의 가장자리로 회전하게 하는 걸까요? 그것은 오직 실재하는 것일까요? 나는 내 집에서 집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탐구자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신비적 스승들, 십자가의 요한, 무지의 구름, 아빌라의 테레사, 노리치의 줄리안은 우리에게 이 갈망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지침을 제공하는 혈통의 소유자입니다. 이 갈망은 실제로 우리를 향한 신의 갈망의 메아리입니다. 신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갈망의 상호 작용으로 운명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럼 이제 기도는 Lectio Divina, 명상, 기도가 아닙니다. 여전히 그렇게 하지만, 이제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그럼 논리는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Unknowing의 구름 세인트 오거스틴은 당신이 하는 일은 당신이 가만히 앉아서, 당신이 당신 주변의 모든 것과 당신 안에 있는 신의 현존 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 마디를 합니다. 간단한 말이 긴 말보다 낫습니다. 당신의 말은 사랑이나 자비, 예,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앉아서, 이것이 연습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말과 함께 이렇게 앉습니다. 그리고 그런데, Unknowing의 구름 또한, 당신은 필요에 따라 단어를 사용합니다. 보세요, 당신이 일종의 열린, 공허한, 아이 같은 주의력으로 앉아 있다면, 당신은 그 안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에 휩쓸리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처럼. 당신은 다시 중심을 잡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 앉아 있습니다. 여기 연습이 있습니다. 당신은 생각이 일어나서 당신의 마음 가장자리로 떨어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것들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생각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이고, 당신은 다시 생각 속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조용히 거기에 앉아서,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우리는 종종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거기에 앉아 있으면, 생각이 방 안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말합니다. 이게 진짜일까, 아니면 당신이 잘못 인도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생각과 토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을 다시 유혹하고 당신은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는 일은 생각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있는 당신과 생각 그 자체인 당신은 신을 기다리는 공허함 속에서 죽습니다. 

또한, 당신의 마음 속에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갖 고통스러운 기억, 행복한 기억들이 옆으로 밀려납니다. 기억에 휘말리지 마십시오. 쿠데타가 당신을 다시 데려갑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그리고 신의 은총으로 당신은 이 갈망의 순결한 직접성으로 계속 돌아가고, 당신을 기억하는 것과 그것이 기억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신을 기다리는 공허함 속에서 죽고, 가라앉는 당신과 그것이 가라앉는 모든 것은 당신이 기다리는 공허함 속에서 죽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에 죽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사랑만 남을 때까지요?그게 당신의 의제입니다.그게 당신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그리고 당신 자신의 평범함, 당신은 여전히 ​​당신일 뿐이고, 당신이 미친 모든 것과 함께, 나는 미쳤고, 우리 모두 미쳤어요.우리는 모두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그게 놀라운 점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평범함 속으로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욕망이 생겨나고 갈망하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랄 것입니다. 또는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많이 산만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랄 것입니다. 항상 무언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소원, 욕망하는 자아는 항상 무언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욕망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나 욕망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모든 욕망으로 향하십시오.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그리고 당신을 욕망하는 것과 그것이 원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신을 기다리는 공허함 속에서 죽습니다. 

중간중간 명상…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앉아 있고, 그리고 만남의 마지막에, 당신은 하루를 보내면서 그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신에게 은총을 구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이 실제로 여러 번 끊어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끊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경험에서, 맹목적으로 사랑에 흔들리는 것은 다릅니다. 제 시적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당신 주변과 당신 안에 있는 신의 현존 속에 앉아 있고, 당신을 초월한 신은 유성처럼 당신의 내면을 통과해 당신 안에 있는 신의 일체성의 숨겨진 장소로 들어가고, 동시에 당신 안에 있는 신의 현존은 유성처럼 들어갑니다. 그것은 당신의 내면과 당신을 초월한 신에게 빛나고, 당신은 마치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당신 안에, 그리고 당신 너머의 신에게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모든 방향에서 신성함이 존재하고, 당신과 신은 이원론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 상호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지의 구름은 말한다, 그래서 실제로 이것과 함께 일어나는 일은 이것이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을 단수 방식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이 지금 사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깨어난 마음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세요, 본질적인 것은 결코 스스로를 강요하지 않으며, 본질적인 것은 무한한 사랑이며, 본질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강요합니다. 끝없이 사라지는 것은 스스로 사라지는 자아를 짊어지고 갑니다. 하지만 깨어난 마음의 명령에 의해 우리는 우리 삶의 순간순간의 영원성에 우리 자신을 다시 접지하도록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은 당신의 마음의 명령이 됩니다. 나는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면의 성실함과 같습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신의 면전에서 이 빈손의 가난에 충실하지 않는 한, 나는 신의 은혜로 침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깊은 곳에서 내가 정말로 존재하고 신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일한 길을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길의 메아리이며, 그것은 영원한 삶이며, 그것은 천국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신비주의자들에 대해 그렇게 놀라운 점입니다. Unknowing의 구름 첫 번째 세 가지, 즉 일반적인 길, 특별한 길, 그리고 특이한 길은 여기서 시작해서 끝납니다. 완벽한 길은 영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영원한 완벽한 길은 이미 여러분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직 죽지 않았더라도, 여러분은 신보다 못한 모든 것에 죽고 있습니다. 제가 표현한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신이 기도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여러분은 이런 헌신적인 성실함의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저는 신이 될 겁니다. 제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이 될 겁니다. 

마크 :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짐 : 네. 알겠습니다. 제가 신이 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요. 맞는 것 같아요. 제게 잘 맞아요. 사실, 우리 모두에게요. 사실 말씀드리자면요. 저는 신이 되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과 제가 서로 하나가 되어가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저는 항상 당신과 하나였지만, 당신은 저와 전혀 하나가 되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게 제게 좋은 만큼 당신에게도 좋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우리는 한 몸이에요. 정말 멋진 일이죠. 하지만 뭔가 알아차리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당신의 조건에 따라 제게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세요. 즉, 당신이 제게, 그리고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당신의 열망과 당신의 영감과 당신의 이해와 당신의 사역에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정말 멋진 일이죠."

내가 말했다, 이해해. 내가 만들었어. 이해해. 진지하게. 하지만 뭔가를 이해해. 아주, 아주 곧 이게 이렇게 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아주 곧 네가 죽을 테고, 영원히 우리는 내 조건에 따라 하나가 될 거고, 네 얼굴에 떠오른 놀란 표정을 보기가 정말 기대돼. 진지하게, 너는 전혀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이 제안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고,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야. 네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내 조건에 따라 나와 하나가 되는 게 어때? 그리고 네가 대답하기 전에, 나는 너에게 두 가지를 말해야 할 의무가 있어. 너는 할 수 없어.

생존 본능이 너무 강해. 하지만 내가 직접 네 삶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들 거야.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나와의 무한한 결합이 네 마음의 불안한 갈망을 잠재울 거야. 내가 이런 식으로 만들 거야.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너는 "음, 다시 연락할게."라고 말할 거야. 하지만 문제는 이거야. 이미 너무 늦었고, 이미 시작됐어. 너보다 무한히 큰 무언가가 무한히 기꺼이 네 진심의 단순함 속에서 네게 자신을 내어주고 있어. 그리고 그것이 네 소명이고, 세상의 카리스마야.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내면적으로 미칠 때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 것입니다." 훌륭한 말입니다. 머튼은 신과 함께, 신의 면전에서 이해하는 것은 자신이 무한히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세 형이상학 철학을 가르치는 댄 월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당신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빛 외에는 당신을 인도할 빛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라. 이것이 기도의 내적 논리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당신과 그것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초월되고 있다. 기억하는 당신과 그것이 기억하는 모든 것이 초월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더 이상 시간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이 깊은 명상 상태에 있다면, 당신은 마지막에 손목시계를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시간 속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영원 속에 있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 모든 것을 통해 흐르고, 끝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정말 신비롭죠. 그리고 당신의 욕망 속에서 당신은 당신이 이룰 수 없는 갈망의 절벽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신의 무한한 사랑이 당신이 무력한 그 연합을 당신 안에서 이룹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없지만, 그것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을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물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것, 즉 우리의 운명에 사로잡혀 끌려가는 눈물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제가 읽고 싶은 중요한 텍스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Unknowing의 구름, 이건 38장인데, 저는 클라우드에 대한 윌리엄 존스턴 번역을 사용했어요. 제가 익숙한 번역이죠. 

그럼 여기 이 작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매우 미묘합니다. "왜 이 작은 기도문, 한 음절이 하늘을 꿰뚫을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것은 사람의 존재 전체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의 높이, 깊이, 길이, 폭으로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는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영의 충만한 힘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이해를 이 작은 단어 하나에 모았기 때문입니다. 길습니다. 만약 이 느낌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그는 지금처럼 영원히 외칠 것입니다. 넓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바라는 보편적인 관심 때문에.

이 기도를 통해 사람은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하고 은혜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길이, 너비, 높이, 깊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완전히는 아닙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관상적 지식의 특징인 그 모호한 방식으로, 길이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통찰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 갈망을 외칩니다. 예수님의 갈망,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갈망은 영원히 외치고, 합쳐져서 신의 영원성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무한한 갈망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 신이 없는 나의 무(無)에 대한 신성화이며, 제가 제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모든 사람을 위해 원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하지만 제 욕망은 모든 사람이 왕국에 초대되기를 바라는 신의 바다 같은 욕망과 합쳐지고, 제 욕망의 폭은 신의 경계 없는 폭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무 높아서 넘어갈 수 없어요. 너무 낮아서 밑으로 들어갈 수 없고, 너무 넓어서 돌아다닐 수 없어요. 이건 법의 말씀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그것이 당신 자신의 초주관적 현실이고, 신이 없다면 당신은 허무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Unknowing의 구름, 우리가 기도에 앉아 있을 때, 진지하게 기도할 때, 하지만 하루 종일 우리는 장난스럽게 기도하고, 당신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하루 종일 눈꼬치로 보이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주방 카운터를 닦는 동안 차 한 잔을 따르는 것처럼 간단한 것. 주방 창문 밖의 경치처럼 간단한 것.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처럼 간단한 것, 시간 있으세요? 물론,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깨닫습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이 하나 있고, 그것이 바로 예수가 살았던 방식입니다. 예수는 육신의 무한함의 불변성 속에서 살았고, 세상에서 살아 있고 실제적인 신비의 즉각성 속에서 육신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영적인 세계관, 관상적 기독교의 시대를 초월한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 기도의 내적 논리는 연속적인 시간의 폐쇄적인 세계를 넘어 시간 자체를 초월하고 스며드는 이 영원성으로 가는 실제적인 경험적 방법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저에게 있어서의 감각입니다.

소녀: 그냥, 키팅이 말한 마지막 문장에서, 신은 동사와 더 비슷해서 항상 '존재하고' 있고 우리를 '존재'로 초대한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항상 다가오고 있다는 깊은 감각이죠. 우리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당신이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공유한 것이 정말 많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마크,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섹션을 보고 있었는데, 여기에도 끼어들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이 초대와 신의 조건에 대한 초대에 관해 당신의 예시로 우리에게 붙잡아두라고 초대했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마크 : 네, 짐, 당신이 말한 게 너무 많아서 그냥 흡수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말했을 때, 당신의 조건에 따라 자신을 내주는 것에 대해 한 가지가 있었는데, 콜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요. 키팅의 글이 생각났어요. 알 수 없는 것의 반영, 그가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무아와 스스로 만든 무아를 주의 깊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 : 네, 사실입니다. 

마크 : 인용문 전체는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 하나님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제안은 인간의 자존심과 우리가 받은 놀라운 창의성의 오용으로 인해 참을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제게 와닿았던 것 같아요. 그게 제 고민이거든요. 제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하고 있지 않아요. 

짐 : 알겠어요. 알다시피, 제게 종종 닿는 친밀감 같은 것 말이에요. 제가 신과의 만남을 위해 앉아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 경주하는 마음이 있고 저는 계속 경주하는 마음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문제예요. 저는 경주하는 마음 속에서 신이 저를 무한히 사랑한다는 대신 경주하는 마음에 실체를 부여하는 자신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제 필요는 제가 미끄러져 나갈 때마다, 넘어질 때마다, 여기에 제가 사용하는 또 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때때로 이런 종류의 신비로운 언어를 들을 때, 제가 사용하는 이미지는 올림픽 높이뛰기 선수와 같습니다. 막대를 얼마나 높이 뛸 수 있을까요? 하지만 막대가 너무 높아 보이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계속 스스로를 지치게 하지만, 저는 계속, 저는 너무 반쪽만 하고, 너무 산만해서 우리 자신의 평범함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신성의 막대를 뛰어넘을 수 없는 와중에, 신이 나와서 놀라운 일을 합니다. 신은 막대를 가져다가 땅에 평평하게 놓습니다. 막대에 다가가서, 그 일의 단순함에 당황한 우리는 그것에 걸려 넘어지고 신의 품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물의 선물입니다. 제가 그것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예수께서 값진 진주라고 부르신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무한한 사랑이 제 안에서 스스로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연약함 속에서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선한 도둑과 같습니다. 당신의 왕국에 들어오실 때 저를 기억해 주세요. 예수님은 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은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체크리스트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는 그저 오늘 당신이 낙원에서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방향에서 바다와 같고 경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고통을 만질 때, 고통은 사랑으로 자비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마음의 기도, 카다프의 기도가 자비입니다. 정말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소녀: 네. 사실 저는 제가 가진 이 다른 인식에 정말 끌립니다. 저는 종종 비이원성을 개념으로 생각하고, 당신의 말을 들으면, 그것은 관계에 있는 방식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됨에 머물고자 하는 신이 주신 욕망이 있다고 말할 때, 저는 그것을 당신이 무한함에 대한 능력에 대한 각성으로서의 수행에 대해 말하는 방식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와 같습니다. 용기는 비어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항상 그것을 너무 많은 것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짐 : 정확히 그렇습니다. 여기에 제가 도움이 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부부 사랑의 이미지입니다. 부부가 결합하는 순간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우리는 하나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하지만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하지만 그들은 둘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임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비이중성은 이원론적으로 이원성이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원성의 무한한 근거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임을 알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침묵이나 고독, 예술, 사랑 속의 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도겐 선사의 말이 항상 이 문제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압니다. 그는 한 쪽이 밝으면 다른 쪽은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타자의 마음에 있다면, 제 주변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저와 다르고,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내가 깊은 명상에 빠져 있다면... 그리고 그런데, 내가 타자의 마음에 있다면, 다음에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오든, 그것은 나 이외의 다른 것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됨의 깊은 명상 마음에 있다면, 모든 것,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그것은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됨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오든, 그것은 더 많은 하나됨입니다. 한 쪽이 밝으면 다른 쪽은 어두울 때, 그것이 깨달음이란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다수와 하나가 서로를 끝없이 영원히 삼켜버리는 것입니까? 

마크 : 네, 그리고 그것은 그 진실에 너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역동적이기도 합니다. 제한적이지 않은 근거, 제가 가끔 생각하듯이, 견고한 근거, 왜냐하면 당신이 말했듯이, 여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짐 : 맞아요.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습관적으로 이런 식으로 안정된 채로 돌아다닐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평범함 속에서 점심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점심을 만드는 것이 이것의 구체적인 표현이에요. 피곤해서 누워 있으면, 피곤해서 누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모든 게 평범함 속에서 드러나는 거예요. 마치 어린아이와 함께 있거나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노인과 함께 있는 것과 같아요. 제 아내는 거실에서 알츠하이머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제가 그녀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모든 게 설명할 수 없이 이래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정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경험의 평범함이 신이 서 있고 앉는 것의 즉각성의 무한함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저 서 있고 앉는 것만으로 말입니다. 머튼은 어떤 종류의 활동적인 사역도 없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그저 삶, 그저 리듬감 있는 단순함과 삶의 선물만을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신은 세상에 구체화된 그 단순함의 무한함입니다. 그것은 우리이고, 우리는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와 함께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그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끝없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는 방식이나 그들과 함께 앉는 방식, 또는 회전부 그들과 함께라면, 그들은 그들의 삶이 계산할 수 없는 방식으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약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녀: 저는 이런 질문이 있는데, 그 대답을 느낍니다. 하지만 청중을 위해서라도, 이 초대에 대한 우리의 저항과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는 깨어난 마음을 그렇게 간절히 버리고 싶어할까요? 그 시가 너무나 아름답게 들립니다. 누가 이곳을 떠나고 싶어할까요? 하지만 쉬운 길도 아닙니다. 당신이 묘사한 방식도요. 또한 모든 것에는 위험의 기미가 있습니다.

짐 : 때때로 사람들이 영적 지도로 나에게 말했어요. 내가 하기 두려운 기도 중 하나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입니다. 신께서 내 기도를 받아주실지도 몰라요. 신께서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그것을 요청했잖아요. 이게 제 생각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요. 기쁨에는 통제력이 없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두려움이라는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찾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것을 버리는 것이 두렵다는 거예요. 하지만 주님, 당신도 제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무한히 이해하시고, 당신은 두려움과 함께 저와 하나이십니다. 제 두려움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세요. 당신이 이미 제 두려움 자체, 제 혼란 자체에서 저와 하나이심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세요. 그것이 제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저는 30년 동안 심리 치료사로 일했고, 트라우마를 다루었습니다. 트라우마의 진짜 의미는 우리가 배신과 버림받음의 순간을 내면화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매우 보호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항복하면 다시 취약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친밀한지 깨닫지만, 어떻게든 우리가 그저 그것과 함께 앉아만 있다면 우리의 두려움에 기반한 저항에 신성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보세요,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것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아직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 안에 있는 부분에 대해 끝없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고 저는 당신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틱 낫 한이 말합니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이 겪은 일을 보세요. 저는 당신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됩니다. 말이 되나요? 

마크 : 네. 저는 때때로 이런 수행의 결과로 제게 더 나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데 갇힌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짐, 저는 최근에 영적 지도 세션에서 지도 대상자와 당신의 대사를 사용했어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신은 우리를 아무것도로부터 보호하고 모든 것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신다는 대사요. 잘 안 풀렸고, 저도 공감할 수 있었어요. 저는 보호받고 싶어요. 저는 모든 것이 바뀌기를 바라요. 어쨌든 제 것들이요, 제가 보기에는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또 다른 것은, 그저 신이 우리와 함께 앉아 계신다는 거예요. 고통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 신이 우리가 짐을 지고 있도록 도와주고, 그것이 반드시 투쟁과 트라우마와 고통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짐 : 사실 그렇습니다. 신은 우리가 세상에서 비폭력적인 보호자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고통이 생길 때, 신은 우리가 일어나 사랑으로 고통을 만져서 사랑으로 녹아내리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기대하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참여하기 위해, 그렇게 하려는 노력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머튼이 말했듯이, 사회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노력의 결과에 지나치게 투자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준으로는 불길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신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방향에서 주권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호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의 일체성. 주목하세요,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너에게 나쁜 일이나 무서운 일이나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그 일에서 너와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신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두려워했습니다. 당신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나의 일상에서 당신의 현존을 찾을 수 있을까요?

소녀: 그게 방금 나를 생각나게 했는데, 방금 이걸 읽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반성 어젯밤에, 그리고 센터링 기도에 대한 이 장에서 강조된 것처럼, 토마스 신부는 "그러나 놓아주려는 노력이 너무 많으면 그 자체가 거짓 자아의 흔적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짐 : 맞아요. 부처님은 중도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중도는 중간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중도에서 너무 강경하면 다른 종류의 강경함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것을 가져야 해요. 우리는 사랑이 현재 순간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펼치는 은혜의 상승과 하락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그 흐름에 따라 가야 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요.

소녀: 상상만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적어도 한 번은 Snowmass에서 Father Thomas를 방문했다고 말했잖아요. 당신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 상상만 할 수 있어요. 

짐 : 정말 좋았어요. 그는 제게 말했어요. 우리는 그의 방에 있었고, 그는 제게 말했어요. 그는 정말 죽기 위해 거기에 왔다고, 그는 그것이 그의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제가 죽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말했어요. 그는 말했어요. 저는 죽지 않을 거라고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여전히 여기 있어요. 그리고 그는 그것이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는 죽었어요.

마크 : 그는 죽기 직전까지 너무나 많은 죽음을 겪었습니다.

짐 : 아니, 정말 그랬어요. 너무 인간적이어서 감동했어요. 토마스 머튼도 제가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런 식이었어요. 그는 너무나 투명하게 인간적이었어요. 그는 바로 거기에 있었고 토마스 신부님도 매우 그런 식이었어요.

마크 : 글쎄요, 그게 당신의 가르침에서 드러나는 역동성이에요, 짐. 그리고 당신이 전체 명상 여정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도요. 여러 면에서 매우 평범하면서도 일상 생활에 대한 것이고 또한 특별하기도 한데, 둘이 서로 만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거기에 있는 순간이에요. 잠깐이라도요.

짐 :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선(禪)의 전통에 속하는데, 선(禪) 스승, 영적 스승은 당신이 스승으로서 그들을 존경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신비롭게 깨어난 스승은 그들 안의 모든 것이 당신에게도 완전히 사실임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믿지 않을 것이고, 스승들은 논쟁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존경을 당신이 아직 경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조치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마크 : 짐, 정말 좋았어요. 몇 시간 더 쉽게, 행복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저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관여하고 있는 몇 가지 일을 언급하고 싶어요. 당신은 여전히 ​​팟캐스트를 하고 있고, 신비주의자들에게로 눈을 돌립니다. 

짐 : 네. 저는 그걸 하는 걸 정말 좋아해요. 방금 순례자의 길, 예수 기도를 마쳤어요. 그리고 방금 TS 엘리엇의 Four Quartets도 마쳤어요.

소녀: 와, 나, 봤어.

짐 : 저는 그 시를 좋아해요. 그리고 저는 다음 시를 생각하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다음 시몬 베일, 유대교 신비주의자를 할지도 몰라요. 

소녀: 네, 부탁드립니다.

짐 : 그래서 그것은 단지 내 삶에 영향을 준 신비주의자들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네, 그것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마크 : 아름답죠. 그리고 사람들은 여러분을 찾을 수 있고, 팟캐스트나 녹음, 그리고 여러분의 책, 그리고 웹사이트에 가면 Center of Action and Contemplation을 통해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짐 : 그렇지.

마크 : 네, 그것을 링크로 연결해서 노트에 추가하겠습니다. 

짐 : 저는 지금 에니어그램의 신비적 분별력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에니어그램의 한계에서 자아 의식, 종교적 의식, 신비적 의식의 분별력의 본질과 예술이 무엇인지 보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으며, 에니어그램이 그 안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쓸모없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왜냐하면 당신은 아, 범주가 없다는 곳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넘어가면 완전한 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에니어그램에서 신비적으로 깨어난 1, 신비적으로 깨어난 2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그 어느 것으로도 축소될 수 없는 XNUMX가지를 모두 오가며 움직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Kirsten Oates와 함께 그 책을 쓰고 있습니다.

마크 : 아, 훌륭해요. 

짐 : 저는 사색적인 임상의였기 때문에 임상의로서의 제 목표는 심리학과 신비주의가 서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걸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크 : 그게 제가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심리 치료사이자 마음챙김 교사로서 당신이 한 말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렇죠.

짐 : 그리고 내년에는 바티칸에서 큰 행사가 열립니다. 로버트 헤스가 신앙과 과학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바티칸에 갔고, 바티칸에서 신앙과 과학에 대한 4일간의 행사가 열릴 예정입니다. 세계 종교 지도자들과 과학자들이 각자의 전통에 독실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연설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종교가 어떻게 신비주의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티칸에서 과학과 신앙이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소녀: 예. 

마크 : 글쎄요, 만약 당신이 몇몇 공동 진행자를 당신과 함께 따라가게 하고 싶다면,

짐 : 하지만 정말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마크 : 그거 재밌을 것 같아요. 

소녀: 이미 Contemplative Outreach 이사회와 직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누가 바티칸 회의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모두가 손을 들어 자원해서 그 회의에 파견되었으니 말입니다. 

마크 : 권리. 

짐 : 그들이 제게 물어봐서 너무나 기뻤어요. 

소녀: 선물이야.

짐 : 저는 제 딸들을 초대해서 저와 함께 그 경험을 하게 했고, 제 아들도 초대했어요. 정말 신의 섭리일 거예요. 예수님, 정말 선물 같은 거예요. 와. 어쨌든,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소녀: 짐에게 고맙네요.

짐 : 저는 토마스 키팅과 그의 가르침, 그리고 세상에서의 명상적인 삶에 매우 헌신적입니다. 저는 그것과 매우 친밀해서 여러분과 함께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소녀: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정말 축복이에요. 정말 많은 축복이에요. 당신의 모든 일, 여행, 글쓰기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기도에 있을 겁니다.

짐 :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크 : 고맙습니다.